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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이 제닝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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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휴이 제닝스는 1890년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수이자 감독으로, 특히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활약했다. 선수 시절에는 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 활약하며 1894년부터 1896년까지 3년 연속 내셔널 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1896년에는 0.401의 타율을 기록했다. 감독으로서 제닝스는 1907년부터 1909년까지 타이거스를 3년 연속 아메리칸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3루 코치로 활동하며 "Ee-Yah"라는 구호와 독특한 동작으로 유명했다. 그는 또한 1945년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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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이 제닝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출생일1869년 4월 2일
출생지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피츠턴
사망일1928년 2월 1일
사망지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스크랜턴
포지션유격수 / 1루수 / 감독
타석/투구우타
선수 경력
MLB 데뷔1891년 6월 1일
MLB 마지막 경기1918년 9월 2일
선수루이빌 커늘스 (1891–1893)
볼티모어 오리올스 (1893–1899)
브루클린 슈퍼바스 (1899–1900)
필라델피아 필리스 (1901–1902)
브루클린 슈퍼바스 (1903)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1907, 1909–1910, 1912, 1918)
감독 경력
감독디트로이트 타이거스 (1907–1920)
뉴욕 자이언츠 (1924–1925)
기록
타율.311
홈런18
타점840
감독 기록1,184–995
승률0.544
수상
월드 시리즈 우승2회 (1921, 1922)
명예의 전당 헌액1945년
명예의 전당 유형전국
헌액 방식올드 타이머 위원회
기타타이거스 명예 선수

2. 초기 생애

펜실베이니아주 피츠턴에서 태어난 제닝스는 1851년 그곳에 도착한 아일랜드 이민자 제임스와 노라의 아들이었다.[1]

제닝스는 지방 무연탄 탄광에서 파쇄자로 일했다. 1890년 펜실베이니아주 리하이턴에서 세미프로 야구팀 유격수로 활약하며 주목을 받았다.[1] 그는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루이빌 커늘스와 계약을 맺었다. 1892년 커늘스가 내셔널 리그에 가입할 때 팀에 잔류했고, 1893년 6월 7일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이적되었다.[1]

3. 선수 경력

제닝스는 1890년 펜실베이니아주 리하이턴에서 세미프로 야구팀의 유격수로 활약하며 주목받았다. 1891년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루이빌 커늘스와 계약을 맺었고, 1892년 내셔널 리그에 합류할 때 커늘스에 잔류했다. 1893년 6월 7일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이적했다.

1899년부터는 브루클린 수퍼바스 소속으로 뛰었고, 여기서도 팀은 리그 2연패를 달성했지만, 제닝스는 시즌 도중 코넬 대학교에 입학하여 법학 공부를 시작했다. 선수로서의 실질적인 활동은 1903년까지였으며, 이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선수 겸 감독이 되어, 타이 콥과 샘 크로퍼드를 이끌고 3년 연속 리그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제닝스는 코치 박스에서 춤을 추면서 지휘하는 유머러스한 모습과 독특한 '''"Ee-Yah"'''라는 구호로 유명했다. 선수 겸 감독이었던 시즌은 12년이나 되었지만, 이 기간 동안 실제로 경기에 출전한 것은 단 9경기였다.

1901년 제닝스는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이적했다. 하지만 필리스에서 82경기 이상 출전하거나 두 시즌 동안 .272 이상 타율을 기록하지 못하는 등 부진하여 선수 경력이 짧아졌다. 제닝스는 1903년 수퍼바스에서 6경기에 출전하여 선수 경력을 사실상 마감했고, 이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감독 재직 중 9번의 타수를 기록했다.

3. 1. 루이빌 커늘스와 볼티모어 오리올스 (1891-1899)

제닝스는 7시즌 동안 오리올스에서 활약하며 스타가 되었다. 1894년, 1895년, 1896년의 볼티모어 오리올스 팀은 역대 최고의 팀 중 하나로 여겨졌다. 이 팀은 명예의 전당 감독 네드 한론과 6명의 훗날 명예의 전당 헌액자들 - 1루수 댄 브루서스, 2루수 존 맥그로, 유격수 제닝스, 포수 윌버트 로빈슨, 우익수 “위 윌리” 킬러, 좌익수 조 켈리 - 을 주축으로 하였다. 제닝스는 1894년에 팀의 주장으로 임명되었다.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명예의 전당 선수 “위 윌리” 킬러, 조 켈리, 존 맥그로, 그리고 휴이 제닝스 (1894년경)


오리올스의 챔피언십 시절 동안 제닝스는 메이저 리그 유격수로서 최고 시즌들을 보냈다. 1895년 그는 .386의 타율, 159득점, 204안타, 53도루를 기록했다. 1896년에는 209안타, 121타점, 70도루와 함께 .401의 타율을 기록하며 더욱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제닝스는 당시 가장 용감한 선수 중 한 명으로, 다른 어떤 선수보다 많은 투구에 몸을 맞는 것으로 알려졌다. 1896년 그는 메이저 리그 기록인 51번이나 투구에 몸을 맞았다. 1894년부터 1898년까지 오리올스에서 5시즌 동안 제닝스는 202번이나 투구에 몸을 맞았다. 한 경기에서 제닝스는 3회에 애머스 루시의 투구에 머리를 맞았으나 경기를 끝까지 소화했다. 경기가 끝난 후 제닝스는 쓰러져 3일 동안 의식을 잃었다.[2][3]

제닝스는 또한 당대 최고의 수비 유격수 중 한 명이기도 했다. 그는 수비율아웃에서 각각 세 번씩 내셔널 리그를 이끌었다. 전성기 시절 그는 한 시즌에 537보살과 425척살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의 425척살은 도니 부시와 함께 유격수 단일 시즌 기록과 타이를 이룬다. 1895년 그는 그 해 유격수 리그 평균(5.54)보다 1.19포인트 높은 6.73의 레인지 팩터를 기록했다. 그는 한 경기에서 20번의 수비 기회를 처리했고, 다른 경기에서는 10개의 보살을 기록했다. 1898년 팔 부상으로 유격수 경력은 막을 내렸고, 이후 제닝스는 1루수로 전향해야 했다.[1]

3. 2. 브루클린 수퍼바스와 필라델피아 필리스 (1899-1903)

1899년 네드 핸런 감독이 브루클린 수퍼바스로 옮길 때 제닝스, 조 켈리, 윌리 킬러를 포함한 몇몇 스타 선수들이 따라갔다. 1898년 팔에 부상을 입은 후, 제닝스는 이전과 같지 않았지만, 1899년1900년 브루클린의 내셔널 리그 페넌트 우승에 공헌하였다.[1]

1901년 제닝스는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이적되었다. 하지만 필리스에서 82경기 이상 출전하거나 2개의 시즌 동안 .272 이상 타율을 기록하지 못하는 등 부진한 팔 상태로 인해 선수 경력이 짧아졌다. 제닝스는 1903년 수퍼바스에서 6경기에 출전하여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감독 재직 중 9번의 타수를 기록한 것을 제외하면 사실상 선수 경력을 마감했다.

3. 3. 선수 시절 특기 사항

제닝스는 7시즌 동안 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 활약하며 스타 선수로 발돋움했다. 1894년, 1895년, 1896년의 볼티모어 오리올스는 역대 최고의 팀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 팀은 명예의 전당 감독 네드 핸런과 6명의 명예의 전당 선수들(댄 브루서스, 존 맥그로, 제닝스, 윌버트 로빈슨, ''위 윌리'' 킬러, 조 켈리)로 구성된 강력한 라인업을 자랑했다. 제닝스는 1894년 팀에 합류하여 첫 풀타임 시즌을 치르면서 주장을 맡았다.

오리올스가 챔피언십을 차지하던 시기에 제닝스는 메이저 리그 유격수로서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1895년에는 타율 .386, 159득점, 204안타, 53도루를 기록했다. 1896년에는 타율 .401(내셔널 리그 2위), 209안타, 121타점, 70도루를 기록하며 더욱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제닝스는 불같은 성격과 용감한 플레이로도 유명했는데, 다른 선수들보다 몸에 맞는 볼을 많이 허용했다. 1896년에는 51개의 몸에 맞는 볼을 기록하여 메이저 리그 기록을 세웠고, 1894년부터 1898년까지 오리올스에서 5시즌 동안 통산 202개의 몸에 맞는 볼을 기록했다. 한번은 아모스 루시의 투구에 머리를 맞고 쓰러져 사흘 동안 의식을 잃기도 했다.[2][3]

수비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수비율아웃에서 각각 세 번씩 내셔널 리그 1위를 차지했다. 전성기에는 한 시즌에 537개의 보살과 425개의 아웃을 기록하기도 했다. 특히 425개의 아웃은 도니 부시와 함께 유격수 단일 시즌 기록 타이기록이다. 1895년에는 레인지 팩터 6.73을 기록했는데, 이는 리그 평균(5.54)보다 1.19포인트나 높은 수치였다. 1898년 팔 부상으로 유격수 경력이 끝나고 1루수로 전향해야 했다.[1]

1891년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의 루이빌 커널스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한 제닝스는 1894년 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 존 맥그로, 윌리 킬러와 함께 내셔널 리그 3연패를 달성했다. 1896년에는 209안타, 타율 .401을 기록하며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그는 매우 공격적인 플레이 스타일로 유명했으며, 1894년부터 1898년까지 5년 연속 리그 최다 사구를 기록했고, 1896년 기록한 51개의 사구는 메이저 리그 시즌 최다 기록이다.

4. 감독 경력

휴이 제닝스는 1907년부터 1920년까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감독을 맡았으며, 1924년1925년에는 뉴욕 자이언츠의 감독 대행을 맡았다.

제닝스는 1907년부터 1909년까지 타이거스를 3년 연속 아메리칸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지만, 월드 시리즈에서는 모두 패했다.

디트로이트 감독 시절 제닝스는 "이-야(Ee-Yah)"라는 독특한 구호와 익살스러운 행동으로 유명했다. 코니 맥은 제닝스를 존 맥그로, 조 매카시와 함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세 명의 감독 중 한 명으로 꼽았다. 제닝스는 타이 코브를 관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의 재능을 인정하고 그를 지지했다.

제닝스는 1920년 시즌 후 타이거스 감독직에서 물러났고, 이후 뉴욕 자이언츠의 코치로 활동했다. 그의 통산 감독 기록은 1184승 995패이다.[8]

연도정규 시즌포스트시즌
경기승률순위승률결과
DET19071509258아메리카 리그 1위04월드 시리즈 패배 (CHC)
DET19081539063아메리카 리그 1위14월드 시리즈 패배 (CHC)
DET19091529854아메리카 리그 1위34월드 시리즈 패배 (PIT)
DET19101548668아메리카 리그 3위
DET19111548965아메리카 리그 2위
DET19121536984아메리카 리그 6위
DET19131536687아메리카 리그 6위
DET19141538073아메리카 리그 4위
DET191515410054아메리카 리그 2위
DET19161548767아메리카 리그 3위
DET19171537875아메리카 리그 4위
DET19181265571아메리카 리그 7위
DET19191408060아메리카 리그 4위
DET19201546193아메리카 리그 7위
DET 합계21031131972412
NYG1924443212임시
colspan=11|
NYG1925322111임시
NYG 합계76532300
총합[8]21791184995412


4. 1.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1907-1920)

1907년, 제닝스는 훗날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타이 코브와 샘 크로포드를 포함한 재능 있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감독으로 기용되었다. 제닝스는 1907년, 1908년, 1909년에 타이거스를 3년 연속 아메리칸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제닝스의 팀은 1907년 월드 시리즈와 1908년 월드 시리즈에서 시카고 컵스에게, 1909년 월드 시리즈에서 호너스 와그너피츠버그 파이리츠에게 패했다. 제닝스는 1920년 시즌까지 타이거스를 계속 감독했지만, 그의 팀은 더 이상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다.

타이거스의 감독으로 재임하는 동안 제닝스는 3루 코치 자리에서 "'''Ee-Yah'''"라는 함성과 함께 다양한 휘파람, 경적, 몸짓 등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1] "Ee-Yah" 함성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고, 양팔을 머리 위로 흔들고 오른쪽 무릎을 날카롭게 들어 올리는 동작이 동반되었다. 1907년에는 상대 선수들을 조롱하기 위해 틴 휘슬을 사용한 혐의로 출전 정지를 당하기도 했다.[3] "Ee-Yah" 함성은 계속되었고, 제닝스는 휴이 "Ee-Yah" 제닝스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타이거스 팬들은 제닝스가 경기장에 나타날 때 똑같이 "Ee-Yah"를 외쳤다.[2][4]

디트로이트의 3루 코치였던 제닝스는 팔을 위로 올리고 오른 다리를 들면서 "이-야!"와 같은 큰 소리를 질렀다.


타이거스 덕아웃에 벨을 들고 있는 휴이 제닝스


이러한 기행 뒤에는 훌륭한 코칭 마인드가 있었다. 코니 맥은 제닝스를 존 맥그로, 조 매카시와 함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세 명의 감독 중 한 명으로 꼽았다.[2] 타이거스에서 그가 겪었던 가장 큰 도전이자 성과 중 하나는 다루기 힘든 선수인 타이 코브를 관리하는 것이었다. 제닝스는 코브의 재능과 그의 복잡한 심리적 구성을 인식하고, 최선의 전략은 코브가 코브가 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1912년, 코브가 관중과의 충돌 사건으로 출장 정지를 당한 후], 정규 팀이 파업에 들어가 대체 선수들로 타이거스가 경기를 치렀을 때, 제닝스는 코치들을 대체 선수로 투입한 후, 직접 대타자로 한 번 타석에 들어섰다.

제닝스는 불같은 성격에, 굳세고, 다채롭고, 심지어 괴짜였지만, 그는 항상 정직하게 경기를 해왔다고 주장했다. 1926년에 타이 코브와 트리스 스피커가 제닝스가 감독으로 있던 1919년 디트로이트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간의 경기를 조작했는지에 대한 스캔들이 발생했을 때, 제닝스는 처음에는 경기를 조작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에 대해 이야기했고, 해당 경기에 대해서는 "노 코멘트"를 발표했다. 1920년 시즌 이후, 제닝스는 타이거스 감독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의 1,131승은 1992년 스파키 앤더슨이 그를 넘어서기 전까지 타이거스 역사상 가장 많은 승리였다.

제닝스는 2000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영구 결번들을 따라 명예가 주어졌다.

4. 2. 뉴욕 자이언츠 (1921-1925)

제닝스는 뉴욕 자이언츠를 감독하고 있던 자신의 옛 친구 존 맥그로와 함께 코치로서 계약을 맺었다. 제닝스와 오리올스에서 동료 선수로 만났던 맥그로는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제닝스는 맥그로의 결혼식에 신랑 들러리였고 1899년 맥그로의 23세 부인이 사망한 후에는 관을 드는 사람이었다.[7] 맥그로와 제닝스는 자신들의 생일에 1년 후, 재결합을 공개적으로 개최하였다.[1][4]

제닝스는 코치로서 1921년1922년 2개의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하였다. 맥그로가 병들었을 때 제닝스는 1924년1925년에 일부 기간 동안 자이언츠의 감독 대행을 맡았다. 그의 전체 감독 기록은 1184승 995패였다.[8]

4. 3. 감독으로서의 특징

1907년, 제닝스는 타이 코브와 샘 크로포드 등 미래의 명예의 전당 헌액자를 포함한 재능 있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팀의 감독으로 고용되었다. 제닝스는 1907년~1909년 3년 연속 아메리칸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제닝스의 팀은 1907년과 1908년 월드 시리즈에서 시카고 컵스에게, 1909년 시리즈에서 호너스 와그너피츠버그 파이리츠에게 패했다. 제닝스는 1920년 시즌까지 타이거스를 계속 지휘했지만, 그의 팀은 더 이상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다.

디트로이트 감독으로 재임하는 동안 제닝스는 주로 3루 코치 박스에서 행했던 기행으로 유명해졌는데, 여기에는 "'''이-야'''"라고 외치고, 다른 함성, 휘파람, 경적, 몸짓, 탭 댄스 등이 포함되었다. "이-야"라는 함성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고, 양팔을 머리 위로 흔들고 오른쪽 무릎을 날카롭게 들어 올리는 동작이 동반되었다.[1] 1907년, 그는 상대 선수들을 조롱하기 위해 틴 휘슬을 사용한 혐의로 출전 정지를 받았다.[3] "이-야" 함성은 계속되었고, 제닝스는 휴이 "이-야" 제닝스로 알려지게 되었고, 디트로이트 팬들은 제닝스가 경기장에 나타나면 "이-야"를 외쳤다.[2][4]

이러한 기행 뒤에는 훌륭한 코칭 마인드가 있었다. 코니 맥은 제닝스를 존 맥그로, 조 매카시와 함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세 명의 감독 중 한 명으로 꼽았다.[2] 디트로이트에서 그가 겪었던 가장 큰 도전이자 성과 중 하나는 통제 불가능한 선수, 즉 타이 코브를 관리하는 것이었다. 제닝스는 코브의 재능과 그의 복잡한 심리적 구성을 인식하고, 최선의 전략은 코브가 코브가 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1912년, 코브가 관중과의 충돌 사건으로 출장 정지를 당한 후, 정규 팀이 파업에 들어가 대체 선수들로 타이거스가 경기를 치렀을 때, 제닝스는 선수 대체를 위해 그의 코치들을 투입한 후, 직접 대타자로 한 번 타석에 들어섰다.

제닝스는 불같은 성격에, 굳세고, 다채롭고, 심지어 괴짜였지만, 그는 항상 정직하게 경기를 해왔다고 주장했다. 1926년에 타이 코브와 트리스 스피커가 제닝스가 감독으로 있던 1919년 디트로이트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간의 경기를 조작했는지에 대한 스캔들이 발생했을 때, 제닝스는 처음에는 경기를 조작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에 대해 이야기했고, 해당 경기에 대해서는 "노 코멘트"를 발표했다.

1920년 시즌 이후, 제닝스는 타이거스 감독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의 1,131승은 1992년 스파키 앤더슨이 그를 넘어서기 전까지 타이거스 역사상 가장 많은 승리였다.

5. 코넬 대학교 법학대학원과 변호사 활동

1899년 시즌 이후 제닝스는 코넬 대학교 법학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는 법률을 공부하면서 코넬 대학교 야구팀 감독을 맡았고, 자신이 감독직에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4] 코넬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제닝스는 파이 델타 세타에 가입했다. 1904년 , 볼티모어 오리올스 감독을 맡기 위해 학교를 떠날 때까지 제닝스는 학구적인 운동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코넬에서 법학 학위를 마치지는 못했지만, 1905년 메릴랜드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 업무를 시작했다. 제닝스는 볼티모어펜실베이니아주 스크랜턴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다.[1][3] 그는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 오프 시즌에 변호사 업무를 계속했다.

6. 비극적인 사고

필라델피아에서 머리에 공을 맞아 3일 동안 의식을 잃었고, 코넬 대학교 재학 중에는 밤에 물이 비어있는 수영장에 머리부터 뛰어들어 두개골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1][2] 1911년 12월에는 자동차 사고로 죽을 뻔했다. 팬들이 선물한 차를 운전하던 중 스크랜턴 남동쪽 약 37.01km 지점인 굴즈보로 근처 르하이 강 다리를 건너다 차가 뒤집혔다. 이 사고로 제닝스는 또다시 두개골이 골절되고 진탕을 겪었으며, 양쪽 다리와 왼쪽 팔이 부러졌다. 사고 후 며칠 동안 의사들은 제닝스의 생존 여부를 확신하지 못했다.[1][4]

7. 사망

제닝스의 일생은 몇 차례 비참한 사고로 채워졌다. 필라델피아에서 빈볼 사고로 3일 동안 의식을 잃었고, 코넬 대학교 재학 중에는 밤에 물이 비워진 수영장으로 거꾸로 뛰어들어 두개골이 부러졌다.[1][2] 1911년 12월에는 스크랜턴 남동쪽으로 약 37.01km 떨어진 굴즈보로 근처의 리하이 강 다리를 건너던 중 자동차가 뒤집히는 사고로 두개골이 부러지고 뇌진탕을 겪었으며, 양다리와 왼쪽 팔이 부러져 죽을 뻔했다.[1][4] 의사들은 제닝스가 생존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이러한 신체적 충격은 제닝스의 건강에 악영향을 미쳤다. 1925년 시즌 중 감독이던 맥그로가 병에 걸려 제닝스가 자이언츠의 책임을 맡았으나, 시즌이 끝날 무렵 신경 쇠약을 겪었다.[1][4] 1926년 훈련에 불참한 제닝스는 노스캐롤라이나주 애슈빌의 요양소로 은퇴했다가 스크랜턴 집으로 돌아와 포코노 산맥에서 회복하며 시간을 보냈다.[4]

1928년 2월 1일, 제닝스는 스크랜턴 자택에서 결핵으로 인한 척수 수막염으로 58세의 나이에 사망했다.[9] 1945년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8. 명예의 전당 헌액

1945년, 베테랑 위원회는 휴이 제닝스를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했다.[1] 제닝스는 1891년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의 루이빌 커널스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2] 1894년에는 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 존 맥그로, 윌리 키러와 함께 내셔널 리그 3연패를 달성했고, 1896년에는 209안타, 타율 0.401을 기록했다.[2] 그는 매우 공격적인 선수였으며, 1894년부터 1898년까지 5년 연속 사구 리그 최다를 기록했고, 1896년에는 51개의 사구로 메이저 리그 시즌 최다 기록을 세웠다.[2]

1899년부터 브루클린 슈퍼바스에서 뛰며 팀의 리그 2연패를 이끌었지만, 시즌 도중 코넬 대학교에 입학하여 법학을 공부했다.[2] 선수로서 실질적인 활동은 1903년까지였고, 1907년부터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선수 겸 감독이 되어 타이 코브, 샘 크로포드 등과 함께 3년 연속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2] 코치 박스에서 춤을 추며 지휘하는 모습과 "Ee-Yah"라는 독특한 구호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1] 선수 겸 감독으로 12시즌을 보냈지만, 실제로 경기에 출전한 것은 9경기에 불과했다.[2]

타이거스 감독직에서 물러난 후, 1924년과 1925년에는 뉴욕 자이언츠의 코치를 맡아 감독 부재 시 팀을 지휘했다.[2] 1928년 결핵으로 인한 수막염으로 사망했다.[2]

9. 상세 정보

제닝스는 선수 시절 뛰어난 타격과 수비 능력을 겸비한 유격수였다. 1890년대 중반 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 전성기를 보내며 팀의 내셔널 리그 3연패(1894~1896)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896년에는 타율 0.401을 기록하며 타격왕에 올랐고, 51개의 몸에 맞는 볼을 기록하며 이 부문 메이저 리그 기록을 세웠다. 통산 287개의 몸에 맞는 볼 역시 역대 1위 기록이다.[2][3]

수비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어 수비율아웃에서 각각 세 번씩 내셔널 리그를 이끌었다. 전성기 시절 한 시즌에 537개의 어시스트와 425개의 아웃을 기록했으며, 425개의 아웃은 도니 부시와 함께 유격수 단일 시즌 기록이다. 1895년에는 경력 최고 레인지 팩터 6.73을 기록했는데, 이는 그 해 유격수의 리그 평균(5.54)보다 1.19포인트 높은 수치였다.[1]

1907년부터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감독을 맡아 3년 연속(1907년, 1908년, 1909년) 아메리칸 리그 우승을 이끌었으나, 월드 시리즈에서는 시카고 컵스(1907, 1908년)와 피츠버그 파이리츠(1909년)에 패했다.[8]

1920년 시즌 후 타이거스 감독직에서 물러난 제닝스는 존 맥그로 감독의 뉴욕 자이언츠 코치로 합류, 1924년1925년에는 맥그로 감독의 병환으로 임시 감독을 맡기도 했다.[8]

9. 1. 연도별 타격 성적

연도소속팀경기타석타수득점안타2루타3루타홈런루타타점도루도루실패4사구삼진병살타희생번트몸에 맞는 볼타율출루율장타율OPS
1891LOU88377351511031081132581217935.293.342.376.718
1892152633594651331642163612830930.224.272.274.546
18932392886123001590313.136.174.170.344
BLN1662556140011760433.255.339.309.648
! '93합계39154143122630132150746.182.240.224.464
1894128583501134168281642401093718372717.335.411.479.890
189513161352915920441742711255328243217.386.444.512.957
1896130602521125209279025412170111911.401.472.488.960
1897117544439133156269220679601742469.355.463.469.932
18981436655341351752511122587287784620.328.454.421.876
1899BRO1655417702011643922.171.346.268.614
BLN288230207200001.375.375.8751.250
BRO512121753557380763414713177.326.424.434.859
! '99합계692752244467312094421810221910.299.408.420.827
1900115505441611201861153693113312029.272.348.347.694
1901PHI823473023879212110739138251229.262.342.354.696
190278322290327913411033287141119.272.330.355.685
1903BRO61917240004110111.235.316.235.551
1907DET144011002000000.250.250.500.750
1909244120002200000.500.500.5001.000
1910100000000000000----------------
1912111000000000001.000.000.000.000
1918100000000000000----------------
통산: 18년128456484895992152623288181988840359347234.312.391.406.797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기록.

9. 2. 타이틀 및 기록

제닝스는 7시즌 동안 오리올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고, 볼티모어 시절 스타 선수로 활약했다. 1894년, 1895년, 1896년의 볼티모어 오리올스 팀은 역대 최고의 팀 중 하나로 꼽힌다. 이 팀은 네드 한론 감독과 6명의 훗날 명예의 전당 헌액 선수들(댄 브라우더스, 존 맥그로, 제닝스, 윌버트 로빈슨, "위 윌리" 키eler, 조 켈리)로 구성되었다. 제닝스는 1894년, 팀의 주장을 맡았다.

오리올스의 챔피언십 시절, 제닝스는 메이저 리그 유격수로서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1895년, 타율 0.386, 159득점, 204안타, 125타점, 53도루를 기록했다. 1896년에는 타율 0.401, 209안타, 121타점, 70도루를 기록하며 더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제닝스는 당시 가장 용감한 선수 중 한 명으로, 다른 어떤 선수보다도 많은 몸에 맞는 볼을 허용했다. 1896년, 그는 51번의 몸에 맞는 볼을 기록했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메이저 리그 기록이다. 1894년부터 1898년까지 오리올스에서 5시즌 동안 제닝스는 202번의 몸에 맞는 볼을 기록했다. 한 경기에서 제닝스는 3회에 아모스 루시의 투구에 머리를 맞았지만 경기를 마쳤고, 경기 후 쓰러져 사흘 동안 의식을 잃었다.[2][3]

제닝스는 최고의 수비 유격수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수비율아웃에서 각각 세 번씩 내셔널 리그를 이끌었다. 전성기 시절 한 시즌에 537개의 어시스트와 425개의 아웃을 기록했다. 그의 425개 아웃은 도니 부시와 함께 유격수 단일 시즌 기록이다. 1895년, 그는 경력 최고 레인지 팩터 6.73을 기록했는데, 이는 그 해 유격수의 리그 평균(5.54)보다 1.19포인트 높았다. 한 경기에서 20번의 수비 기회를 처리했고, 다른 경기에서는 10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1898년, 팔을 다쳐 유격수 경력은 막을 내렸고, 이후 1루수로 포지션을 옮겼다.[1]

  • 내셔널 리그 우승: 5회 (1894, 1895, 1896, 1899, 1900년)
  • 시즌 최다 사구: '''51''' (1896년)
  • 통산 최다 사구: '''287''' (역대 1위)
  • 시즌 자살수 (유격수): '''425''' (역대 1위)

9. 3. 감독으로서의 전적

wikitext

제닝스는 1907년부터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감독을 맡아 1907년, 1908년, 1909년 3년 연속 아메리칸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8] 하지만 월드 시리즈에서는 1907년1908년에는 시카고 컵스에게, 1909년에는 호너스 와그너가 이끄는 피츠버그 파이리츠에게 패했다.[8]

1920년 시즌 후 타이거스 감독직에서 물러난 제닝스는 존 맥그로가 감독하던 뉴욕 자이언츠의 코치로 합류했다.[8] 1924년1925년에는 맥그로 감독이 아플 때 임시 감독을 맡기도 했다.[8] 그의 전체 감독 기록은 1184승 995패였다.[8]


리그경기승리패전승률순위비고
1907DETAL1539258.6131위1경기 출장
19081549063.5881위
19091589854.6451위2경기 출장
19101558668.5583위1경기 출장
19111548965.5782위
19121546984.4516위1경기 출장
19131536687.4316위
19141578073.5234위
191515610054.6492위
19161558767.5653위
19171547875.5104위
19181285571.4377위1경기 출장
19191408060.5714위
19201556193.3967위
1924NYGNL443212.7273위5월 21일~7월 6일
1925322111.6561위5월 4일~6월 8일
통산 성적22021184995.543


참조

[1] 뉴스 Hugh Jennings Dies After a Long Illness – Famous Baseball Veteran, Ailing for Three Years, Succumbs in Scranton – Was Picturesque Figure – Captained Old Orioles, Won Three Pennants for Detroit and Helped Giants Take Four http://timesmachine.[...] New York Times 2015-12-28
[2] 웹사이트 Michigan History http://info.detnews.[...]
[3] 웹사이트 CAM Cornelliana http://cornellalumni[...]
[4] 웹사이트 TheDeadballEra.com :: HUGHIE JENNINGS' OBIT http://www.thedeadba[...]
[5] 서적 Fireside Book of Baseball
[6] 서적 Cobb: The Life and Times of the Meanest Man Who Ever Played Baseball 1994
[7] 웹사이트 Hughie Jennings https://baseballbiog[...]
[8] 웹사이트 Hughie Jennings https://www.baseball[...] Sports Reference 2015-10-01
[9] 뉴스 Hughie Jennings Was Baseball's First and Probably Greatest Miracle Man https://www.newspape[...] 1928-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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